간략한 줄거리
『배트맨과 로빈 (Batman & Robin, 1997)』은 조엘 슈마허가 연출한 배트맨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자, 클래식 시리즈의 종지부를 찍은 영화이다. 조지 클루니가 배트맨을 연기하며, 로빈(크리스 오도넬), 배트걸(앨리시아 실버스톤)이 본격적으로 팀을 이룬다. 그러나 고담을 얼려버리려는 미스터 프리즈(아놀드 슈왈제네거), 유혹의 식물학자 포이즌 아이비(우마 서먼)의 등장으로 팀은 분열을 겪고, 시리즈는 전례 없는 시각적 과잉과 스타일의 중심에서 흔들린다.
얼어붙은 고담, 색채와 과잉의 미학
『배트맨과 로빈』은 전작보다 훨씬 더 과장되고 환상적인 고담시를 선보인다. 네온 불빛이 도배된 도시, 기하학적 건축물, 얼음과 식물이 공존하는 세트는 현실성과는 점점 멀어지며, 거의 무대극에 가까운 시각적 과잉을 구현한다. 조엘 슈마허는 이 영화를 '코믹북의 실사 구현'이라는 방향으로 끌고 갔고, 이는 의도적이고 철저한 스타일이었다. 문제는 이 과잉이 서사를 압도한다는 점이다. 시각적으로는 화려하고 독창적이지만, 인물의 감정이나 갈등은 얕아진다. 액션 장면은 무게감보다 연극적 연출에 가깝고, 캐릭터의 의상이나 무기도 지나치게 만화적이다. 이는 일종의 ‘비현실의 미학’으로 볼 수 있으나, 기존 팬들에게는 진지했던 배트맨의 정체성과의 괴리감으로 작용했다. 고담은 ‘얼어붙은 도시’로 연출되며, 미스터 프리즈의 영향 아래 시종일관 차가운 색감과 블루톤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포이즌 아이비의 식물 미학이 붉은색, 초록색으로 대비되며 시각적 대립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런 구성이 영화 전체를 산만하게 만들기도 한다. 비주얼은 풍부하지만 의미는 희박해졌고, 연출은 강렬하지만 정서는 얕아졌다. 『배트맨과 로빈』의 고담은 더 이상 도시라기보다 ‘무대’이고, 캐릭터는 현실 속 인물이 아닌 ‘쇼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진다. 이는 영화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시리즈가 내적 일관성을 잃고 새로운 방향성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스터 프리즈와 포이즌 아이비, 비극과 유혹의 이중성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연기한 ‘미스터 프리즈’다. 그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냉동 캡슐 속에서 아내를 살리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비극적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의 비극성은 반복되는 냉담한 대사와 희화화된 복장, 얼음 관련 유머로 인해 진정성을 잃는다. 그의 서사는 감동적이지만, 연출 방식은 지나치게 유쾌하고 가벼워 서사의 무게와 상충한다. 반면, 포이즌 아이비는 지구 환경과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급진적 식물학자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유혹적 이미지와 ‘독의 키스’ 능력은 결국 전형적인 팜므파탈로 축소된다. 우마 서먼은 연기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캐릭터의 중심 동기는 흐릿하며, 극 중 비중은 오락적인 장치로 소비된다. 이 두 캐릭터는 각각 ‘사랑’과 ‘욕망’을 상징하지만, 영화는 이를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주얼을 위한 기능적 존재로 배치되고, 배트맨과 로빈의 성장 서사와 병렬적으로 배치되지만 깊은 연결점은 없다. 결국, 빌런의 역할이 단순한 장애물로 축소되면서, 전작들이 구축해온 상징성과 내면 갈등의 복합성은 희미해졌다. 『배트맨과 로빈』은 악당조차 ‘쇼의 일부’가 되어버린 영화다. 그들은 갈등의 중심에 서 있지 않으며, 영웅의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도 못한다. 이는 이 영화가 스타일은 넘치지만, 이야기 중심성이 결여된 가장 큰 이유다.
팀워크의 붕괴와 배트맨 시리즈의 종말
『배트맨과 로빈』은 배트맨 시리즈 사상 가장 확장된 팀 구성을 선보인다. 브루스 웨인(배트맨), 딕 그레이슨(로빈), 그리고 바바라 윌슨(배트걸)이 한 팀을 이루어 고담을 지키게 되지만, 이 팀워크는 영화 속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각 캐릭터는 충분한 내적 갈등과 서사를 부여받지 못했고, 단지 화려한 액션과 장면 분배 속에서 기능적으로만 존재한다. 배트맨과 로빈은 끊임없이 충돌하며, 신뢰의 균열을 보인다. 이는 심리적 갈등이라기보다 반복적인 대사로 설명되는 갈등에 그치며, 관객에게 감정적 설득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배트걸은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강제로 서사에 진입하며, 브루스와의 유대도 미흡하게 그려진다. 이는 모든 팀원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가족'으로 느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이러한 팀워크의 부재는 캐릭터 중심이 아닌, 상품 중심의 기획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액션 피규어, 오락성, 시각적 쾌감을 중심에 두었고, 그 결과 캐릭터는 오히려 주변화되었다. 이는 이후 시리즈가 중단된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워너브라더스가 배트맨 실사 세계관을 전면 재정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배트맨과 로빈』은 시각적 과잉, 캐릭터 소비, 서사의 부재가 중첩된 결과물이다. 조엘 슈마허 감독은 이후 이 영화에 대해 사과하며, 팬들의 배트맨에 대한 애정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을 인정했다. 이 작품은 한 시대를 닫고, ‘다크 나이트’로 이어지는 리부트 시대의 서막을 여는 반면교사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