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줄거리
『더 배트맨 (The Batman, 2022)』는 맷 리브스 감독이 연출하고 로버트 패틴슨이 주연을 맡은 새로운 리부트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영화는 배트맨 2년 차 시점의 브루스 웨인이 복수자로서 고담시를 감시하며 시작된다. 그러나 시장 살인을 시작으로 연쇄 살인을 벌이는 정체불명의 범죄자 ‘리들러’가 등장하면서, 브루스는 단순한 범죄자 검거를 넘어 고담 전체에 얽힌 거대한 부패와 음모의 진실에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복수의 무기였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공포에서 희망으로 거듭나는 배트맨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고담의 음모, 진실을 파헤치는 복수자
『더 배트맨』의 출발점은 영웅의 신화가 아닌, 누아르적 복수극이다. 영화는 배트맨이 ‘I’m vengeance(나는 복수다)’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그가 정의가 아닌 분노와 고통의 감정에서 출발한 인물임을 명확히 한다. 고담은 부패와 범죄, 권력의 유착으로 썩어 있는 도시이며, 배트맨은 이 도시의 어둠 속에서 범죄자들을 공포로 압도하는 존재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시장이 피살되고, 리들러가 사회적 인물들을 표적으로 연쇄 살인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배트맨은 단순한 복수자가 아니라 ‘진실의 탐색자’로 변모하게 된다. 수사를 통해 브루스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 토머스 웨인의 과거, 그리고 웨인 재단의 자금이 어둠의 세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가 믿고 있었던 ‘선’의 기둥이 무너지는 순간, 배트맨은 자신의 존재 근원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탐정 장르에 가까운 전개를 보여준다. 범죄 현장의 단서, 암호 해독, 상징적 메시지, 경찰과의 협력 등은 배트맨을 ‘고담 최고의 탐정’으로 기능하게 만들고, 관객은 함께 퍼즐을 풀어나가는 쾌감을 느낀다. 동시에 브루스는 자신의 방식이 때로는 고담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더 배트맨』은 복수를 무기로 삼았던 주인공이, 그 무기에서 벗어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어둠 속을 걷는 사람에게도 희망이라는 목적지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리들러의 정의, 왜곡된 정의감의 거울
이 영화의 핵심 빌런인 리들러는 전작들처럼 과장된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고통받은 인물이며, 그 분노를 계획적이고 치밀한 방식으로 사회에 되갚아주는 존재다. 그가 선택한 대상들은 고담의 ‘가면 쓴 위선자들’로, 시민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이권과 권력을 탐한 인물들이다. 그의 행동은 잔인하지만, 목적은 ‘정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배트맨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리들러는 배트맨과의 유사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통해 고담의 부패를 시민들에게 직접 폭로하고, 법이 감당하지 못한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배트맨에게 ‘동지의식’을 느끼며, 둘이 함께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고 착각한다. 이 왜곡된 유대는 배트맨에게 충격을 안기며, 자신의 방식이 범죄자와 무엇이 달랐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리들러는 SNS를 활용한 선동, 마스크를 쓴 추종자들의 폭동 등 현실 사회와 맞닿은 위협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고담이라는 가상 도시의 문제가 아닌, 현대 도시의 불신과 양극화, 정치적 극단주의의 그림자로도 읽힌다. 이로써 『더 배트맨』은 단순한 선악 대결이 아닌, 정의의 기준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영화로 확장된다. 배트맨은 리들러를 통해 깨닫는다. 고통과 상처가 정의로 환원되기 위해선, 분노가 아닌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 리들러는 복수의 거울이고, 배트맨은 그 거울을 부숴야만 진정한 정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는다.
배트맨의 진화, 공포에서 상징으로
『더 배트맨』은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본질을 다시 묻고, 그 답을 ‘진화’로 제시한다. 영화 초반의 배트맨은 공포의 대명사다. 그는 범죄자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존재로, 그림자처럼 나타나 응징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리들러와 같은 존재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리들러는 배트맨을 따라했고, 그 방식으로 고담을 파괴했다. 배트맨은 자신의 존재가 단지 공포를 넘어서야 함을 깨닫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배트맨의 정체성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난이 발생한 시청 홀 안에서, 그는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고, 그들을 이끌며 구조한다. 이어 플레어를 들고 어둠 속을 걷는 장면은 이제 그가 ‘공포의 상징’이 아닌 ‘희망의 등불’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시민의 손을 잡는 장면은, 처음으로 고담 시민이 배트맨을 외부의 존재가 아닌 ‘우리 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또한, 브루스는 셀리나 카일(캣우먼)과의 관계를 통해 고담을 떠날 수 있는 선택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고담에 남기로 한다. 이 선택은 영웅이란 타이틀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 아닌, 이제 ‘책임지는 자’로서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고통에 갇힌 이가 아니다. 그는 도시 전체를 위한 상징으로 거듭난다. 『더 배트맨』은 그래서 기원의 영화가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복수에서 정의로, 공포에서 희망으로. 배트맨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적이며,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영웅적인 존재로 그려진다.